설교

부활의 증인

별량제일 2022. 4. 23. 15:31

220424주일오전 사도행전 18절 부활의 증인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지난 주일에 생각했던 말씀 먼저 반복학습하고 시작하겠습니다.  

로마서 834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다시 살리실 줄로 믿습니다.

이런 부활의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신다고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거기서 무엇을 하십니까?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 어느 누가 우릴 정죄한다고 해도, 그 정죄는 다 헛것이 되고 맙니다.

왜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 곧 변호를 하고 계시니까요.

 

우리가 죄를 짓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는 연약해서 원치 않는 죄를 지으며 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요. 예수님께서 여전히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해 변호를 하고 계시니,

우리가 지은 죄를 솔직하게 다 고백하면 모든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이런 용서의 확신가운데 사시고, 죄에서 자유해진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부활의 증인이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내 증인이 되리라.”고 나옵니다.

누구의 증인이죠? . 맞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우린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믿지요? 예수님께서 날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내 모든 죄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을 믿어요.

 

,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데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처럼, 우리들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어요.

우리는 이런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그 부활을 증거하는 부활의 증인입니다.

 

인도의 선교사 썬다 싱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특별히 어느 대학 교수가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오랜 동안 가졌던 전통 힌두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믿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힌두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바꾸었습니까?”

 

썬다 싱은 이렇게 간단하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세계의 그 어떤 종교에도 창시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세계의 3대 종교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라고 합니다.

불교의 창시자 누구이죠? 석가모니(석존, 본명:고타마 싯다르타)입니다.

석가모니가 약 80세에 죽었는데요, 다시 살아났다는 말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아니요. 들어본 적이 없어요. 부활하지 않았으니까요.

 

이슬람교의 창시자는 누구이죠? 무함마드입니다.

62세에 죽었는데요. 혹 무함마드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아니요. 들어본 적이 없어요. 부활하지 않았으니까요.

 

이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죽었고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저들은 어디까지나 사람일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물론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나셨지만, 사람들처럼 그렇게 태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석가모니, 무함마드 이런 세상 종교 창시자들하고 근본적으로 다르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확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세상 종교하고 우리 기독교하고는 판이하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세상 종교는 종교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이죠?

이 세상의 아픔과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한 삶을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되기 위해서죠.

돌려서 이야기 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부자가 되고 건강하고 장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다릅니다. 우리 기독교는 세상의 종교와는 다릅니다.

종교생활의 목적이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라면, 우리 기독교 신앙생활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이 아닌 저 하늘나라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천국에 가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우린 확실히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되는 복을 누리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목적과 결과가 바꿔지면 곤란합니다. 그러면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목적은 천국에 가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의 영생복락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다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복입니다. 복은 결과입니다.

잠언 224

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생명(.: 장수, .: 건강)은 곧 풍요로운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기 위해서임을 확실히 하시고요,

신앙생활 잘 하셔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풍요로운 삶을 누리며 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다시 부활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허무맹랑한 전설의 고향과 같이 취급을 합니다.

저들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의 믿음도 복음도 구원도 다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23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죄로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과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본 적도 볼 수도 없지만, 이것을 믿어요.

어떻게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증거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감동을 주셔서 확실한 믿음을 갖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성령님께서 감동해주시는 그 믿음을 가지시고,

예수님은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내가 죽는다 해도 나는 부활한다.’

확실하게 부활의 신앙을 가지시고 부활을 선포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그럼 부활의 증인으로서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저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었는지를 보면서,

우리들도 부활의 증인으로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16:11,13,14에 보면, 듣고도 믿지 아니한 모습들이 나오고요.

이런 제자들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거든요.

16:21, 17:22-23 등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하여

반복하여 강조하여 말씀을 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단 말이에요.

이런 제자들이 어떻게 부활의 증인이 되었을까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처럼, 성령님께서 임하셔서 권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전할 수 있는 능력, 권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부활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본 적도 없어요. 예수님을 볼 수도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단 말입니까?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우리 육체의 눈으로 예수님을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영적인 부분입니다.

우리 육체의 눈으로는 불가하지만, 우리 영으로는 느낄 수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평강이 있습니다. 믿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님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성령님께서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나와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밖에 없음을 알게 하시고,

내 마음을 감동해주셔서, 예수님께서 날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게 하십니다.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 안에 무엇이 있어요?

구원의 기쁨과 감격함이 있습니다. 때로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경험하곤 합니다.

죄와 사망에서 해방이 되었으니, 참 자유를 누리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평강으로 우리 맘에 가득하게 됩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날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며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끝없는 사랑을 우리로 느끼게 하십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행하신다는, 아주 놀라운 믿음까지 갖게 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을 볼 수 없지만

성령님의 역사로, 마치 실제적으로 보고 사는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하고 계심을 느끼고 확신하고,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과 평강으로 넘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렇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임하셔서 실제적인 믿음을 갖게 되면,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맘속에는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평강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한 가지만 덧붙여서 전하고 마치겠습니다.

15년 전 즈음에 읽은 내용이라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저가 읽었던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면서, 물을 뿌리는 거하고,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걸로 비유를 했습니다.

식물과 꽃이 잘 자라도록 우리가 물을 뿌려주는데요.

하늘에서 내리는 비하고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서 내려주는 은혜의 단비가 우리 마음의 밭을 촉촉이 적셔줍니다.

하늘에서 기쁨의 단비가 우리 마음에 내립니다.

그러면요, 우리 마음속의 어떤 슬픔도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위로의 단비가 우리 마음에 내립니다.

그러면요, 우리 마음속의 어떤 상처도 다 견뎌낼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평강의 단비가 우리 마음에 내립니다.

그러면요, 우리 마음속의 어떤 두려움도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찬송가 412장에 보면, 참 마음에 와닿는 가사가 있습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하늘에서 평화의 단비가 내려서, 우리 영혼을 흠뻑 적시고요,

주님의 한없으신 사랑의 물결이 우리 영혼을 완전히 덮어버려서요,

어떤 아픔도 고통도 어려움도 두려움도 슬픔도 상처도 다 이겨내시고,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탄식이 변하여 찬송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

성령님께서 임하셔서, 예수님을 실제로 보고 사는 것과 같은, 실제적인 믿음을 갖게 하시고,

부활의 확신과 담대함을 주셔서,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소서.

 

하늘에서 기쁨의 단비, 위로의 단비, 평강의 단비를 내려주셔서,

우리의 영혼을 흠뻑 적셔주소서.,

그래서 어떤 아픔과 고통도 다 이겨내고, 승리의 찬송을 부르게 하소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