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0 누가복음 19장 5절 삭개오를 부르신 예수님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화면보기) 요한복음 3장 16절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습니다.
자, 잠깐 그 과정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약혼을 하고 아직 결혼하여 같이 살기 전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임신한 거에요. 아직 자신하고 살기 전인데 말이죠.
그래서 요셉은 ‘마리아가 부끄러운 일을 당하였구나.’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도 요셉이 괜찮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약혼녀가 당한 부끄러운 일을 드러내지 않고,
마리아와의 관계를 가만히 끊고자하였습니다. 이때에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화면보기) 마태복음 1장 20-21절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리아가 임신한 것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지 어떤 부정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마리아 데려오는 걸 무서워할 것도 아니고, 주저할 것도 아니니, 마리아를 데려와서 아내로 맞이하라고 합니다.
요셉은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뭐라고 하라고 했지요? ‘예수’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 헬라어로 예수이고요, 구약성경에 히브리어로는 여호수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보내셨다는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는데요.
우리 어찌 기쁨으로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지난주, 금요일 기타를 치면서, 성탄 찬송을 부르는데요. 마음이 참 기뻤습니다.
찬송가 115장, “기쁘다 구주 오셨네.”와 123장, “저 들밖에 한 밤 중에” 두 곡을 이어서 불렀습니다.
같은 라장조이니까, 이어서 부를 수가 있거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성탄절 찬송을 왜 꼭 성탄절에만 불러야 합니까?
12월에 대림절 기간에 내내 불러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저는 성탄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참 기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셨다.’
‘예수님께서 내 죄 문제를 다 해결하여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이 성탄의 기쁨으로 충만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자, 이제 오늘 말씀 보십시다. 삭개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서, 그 곳을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는데요, 그는 세리장이고, 부자였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그는 키가 작기 때문에,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화면에 보이는 것처럼, 높은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거기를 지나가시다가, 마침내 삭개오가 올라가 있는 돌 무화과나무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쳐다보시고, 삭개오에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너의 집에서 머물러야 하겠다.”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삭개오가 일어서더니, 주님께 말하였습니다.
“주님, 보십시오. 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오늘 말씀 2절에 보면, 삭개오는 어떤 사람입니까? 세리장입니다. 세리장은 세무를 관장하는 책임자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 사람들은 세무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왜 그렇죠? 세리는 로마 제국이라는 권력에 기생하며 동족을 괴롭히고, 자신의 배를 채우던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유대사람이라면, 이런 세리 더구나 세리장을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상종하지 못할 사람, 요즘 종종 이런 표현을 듣곤 하는데요. 말 섞기도 싫은 사람입니다.
그런 삭개오였지만, 3절 말씀처럼,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 싶었단 말입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자신과 같은 직업 세리도 있었잖아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야고보, 다대오, 시몬, 가룟 유다인데요.
마10:3에 나오는 것처럼, 마태가 세리입니다.
자신과 같이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경멸받는 ‘세리’란 직업을 가진 마태를
제자로 삼으신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키가 작아서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높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뜻밖의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단순히 보려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인데,
그곳을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삭개오를 쳐다보셨습니다.
그리고선 삭개오를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니 그러고요, 어떻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아시는 겁니까?
어떻게 아셨는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삭개오야!”
거기다가 많은 사람들이 세리를 더럽게 여기고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집에 유하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놀라운 경험을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삭개오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 중에 최고였을 것입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기쁨이요 최고의 순간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삭개오가 세리가 된 이후로 어느 누가 삭개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냈겠습니까?
그에게는 차가운 시선만 있었습니다. 더구나 세리장이 되었을 때는 모두 등을 돌렸겠지요.
경멸하고 적대시하는 그런 눈길 속에서 살고 있었던 삭개오인데,
예수님께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부르시는 거에요.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거에요.
“삭개오야! 이리 내려오너라.”
예수님과 삭개오는 언제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을 부르고 계시는 거에요.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찾지 않고,
아무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가슴에 다가오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따스함 …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들의 이름을 부르시는 줄로 믿으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볼 수 없지만, 예수님의 눈동자는 우리를 늘 향하고 계십니다.
내 모습 이대로 받으시는 예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버리지 않으시고, 품어주십니다.
불러주십니다. “사랑하는 내 딸아,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세영아!”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화면보기)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3절은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뿐예요
1)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아들아 네게 축복 더 하리라
2)사랑한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 딸아 네게 축복 더 하리라
3)사랑한다 ○○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아 네게 축복 더 하리라
외로운 삭개오, 많은 것을 가졌지만 행복하지 않은 삭개오,
그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성품이 착하고,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고, 다른 사람들보다 재능이 많고 그래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늘 예수님 말씀대로 살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습니까?
내 안에 아직도 욕심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뜻보다 내 뜻을 더 주장할 때도 있습니다.
입술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십니다.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해주십니다.
나를 찾아오십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이곳에, 우리가 예배하는 이 자리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계시는 줄로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시간에 구경만하다가 가는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며 말씀에 집중합시다.
정성을 다해 예배합시다. 그래서 찾아오시어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럼,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저 내 마음이 뜨거워지고, 기쁨과 위로와 평강이 넘치면 되는 겁니까?
물론 이러한 감정을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이런 감정에만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감정적으로 만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삭개오의 대답에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화면보기) 누가복음 19장 8절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배상하겠다고 합니다.
삭개오가 이런 나눔, 사랑의 삶을 살게 된 계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시켜서 억지로 하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떤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어쩔 수없이 하게 되었나요? 아닙니다.
삭개오의 변화는 억지로 어쩔 수 없이 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원해서 된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부드럽게 부르시며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이 되어 나눔을 실천하며 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감동을 받고, 내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나는, 그 크신 사랑에 감동하였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받으시는 예수님을 본받아 포용하고 싶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본받아 어느 누구나 사랑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으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이제는 주고 나누며 사랑을 실천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내 가슴에 흘러들어와, 나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고 싶습니다.
(화면보기) 베드로전서 1장 22절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받으신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으시고, 뜨겁게 주님을 이웃을 사랑하며,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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